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전쟁 (문단 편집) === 한국에 끼친 영향 === [youtube(j5xqsL8plJM)] >'''"...국론이 통일되지 않고 국민의 총화 단결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 불안과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즉 집안 싸움만 하다가 패전을 당한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점을 특별히 "타산지석"으로 삼고 또 교훈으로 명심해야 될 줄 압니다. 그러면 인도지나 반도 사태가 한반도 및 우리의 안보에 어떤 영향을 미치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 >'''인도지나 반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쓰고 있는 "인민 해방 전쟁"이나 "폭나 혁명 전략"이라는 것은 우리 나라의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쓰고 있는 소위 "남조선 해방"이니 "남조선 혁명 전략"이니 하는 것과 똑같은 아세아 국제 공산주의 전략의 일환이고 또 그 공동 전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 >{{{#!folding 전문보기 >(중략) > >따라서 가정 호전적이고 악명높은 [[북한|북한 공산 집단]]이 오늘의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겠읍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은 어떤 흉계와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해방 후 지난 30년 동안 그들은 이것만을 연구해 왔고 이러한 음모만을 꾸며 왔던 그들이기 때문에 오늘의 인도지나 사태와 정세를 보고 가만히 있을리가 만무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크게 용기를 얻고 고무가 되었을 것입니다. > >우리 한반도에서도 소위 "인민 해방 전쟁"이니 "남조선 혁명"이니 하는 것이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김일성]]은 북경에 가서 [[적화통일|"남조선 혁명"]]을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할 것이고 전쟁이 나면 성공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다 되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읍니다. 이것은 우리에 대한 지극히 도전적인 말 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읍니다. > >[[10월 유신|"10월유신"]]에 의해 유신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헌법이 바뀌었읍니다만은 만약에 유신 헌법이 생기지 않고 구(舊) 헌법대로 한다면 금년 봄이 대통령 선거와 국회 의원 선거를 하는 해 입니다. 아마 지금쯤 대통령 선거를 할 것이고 다음 달에 가서는 국회 의원 선거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시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선거의 해라는 것은 한마디로 우리의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입니다. > >선거 때만 되면 사회 혼란, 정국 불안, 행정의 공백을 가져 옵니다. 선거 때 뿐 아니라 선거 전 6개월 혹은 1년 전부터 선거 바람이 불어 사회가 시끄럽고 혼란하고 또 행정의 공백을 거듭하는 양상을 띄다가 선거 때만 되면 이것이 절정에 도달해서 그야말로 나라의 기틀이 흔들릴 정도로 시끄러워 지는 것이 우리나라의 선거 풍조입니다. > >(중략) > >우리나라는 이처럼 매 4년마다 하는 선거를 중심으로 전후 1년 내지 2년 동안 여러가지 사회 혼란, 정치 불안, 행정 공백으로 국력이 가장 약화되는 시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제8대 국회의원 선거|지난 71년도의 선거]]를 보고 이와 같은 시기에다가 "타이밍"을 맞춘 것일 것입니다. > >(중략) > >그들이 이러한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에 뜻밖에도 그들로 하여금 크게 용기와 자신을 얻게하고 고무시켜준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바로 '''인도지나 사태'''인 것입니다. 그들은 인도지나 사태를 보고 이 시기가 '''[[적화통일|"남조선 혁명"]]'''의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 >우리는 여하한 적의 공격도 능히 이를 저지하고 격멸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 여러분들은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가 이 자리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만약에 이런 사태가 일어났을때 여기에 대처할 수 있는 굳건한 결의와 각오와 반드시 이겨야 되고 또 이길 수 있다는 필승의 신념이 우리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 속에 확실히 서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 >(중략) > >우리는 이런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국민 여러분들은 잘 아셔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가지고도 왜 우리가 나라를 지키지 못하겠는가, 지키지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읍니다. 만약에 있다면 우리들의 각오와 결의에 달려있읍니다. 따라서 앞으로 국민 여러분들은 정부와 군을 믿어 주시기 바라고 또 우리 정부는 슬기롭고 용감한 국민 여러분을 믿고 우리가 일치단결해서 필승의 신념을 가지고 의연한 자세로써 모든 사태에 대처해 나가야 하겠읍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제가끔 자기가 맡은 직책과 일에 대해서 보다더 충실하고 책임있게 해나가야 하겠읍니다. 이것만이 국난 극복을 위해 우리 국민들이 가져야 할 자세요 또 우리들이 나갈길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 >국민 여러분들의 행운과 건투를 빕니다."}}} >---- >- '''[[박정희]] 대통령''', [[대한뉴스]] <[특보] 박 대통령 특별 담화> 보도 중 일부, 1975.04.29 [[한국]]의 참전은 비록 장병들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긴 했지만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에너지였다. [[손톱깎이]] 하나 만들 수 없었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는 한국산 [[손톱깎이]]가 세계 시장 점유율이 높은 편이다.] 나라가 몇 년만에 일약 공업국가가 됐다. 당시의 세계적으로 가장 컸던 이슈는 단연 베트남 전쟁이었고, [[한국군]]의 대게릴라전법, 대민 심리전, 용맹성은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완전히 다른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다. 런던타임스는 "한국군이 베트남 전역을 맡았거나 한국군의 전술을 채택했다면 벌써 승리로 끝났을 것" 이라는 논평을 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053000209203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05-30&officeId=00020&pageNo=3&printNo=13725&publishType=00020|#]] 지금은 [[IMF]]가 돈줄을 쥐고 있지만, 당시에는 서방 11개국 금융클럽이 쥐고 있었다. 11개국은 10억 달러 외자도입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는등 한국의 발전가능성에 대해 매우 냉소적으로 평가했었으나 베트남 전쟁이후 한반도의 공산화를 두려워했던 미국이 한국의 경제발전을 통한 동북아시아에서의 민주진영 확대 및 추가적인 반공세력 견제필요성을 절감하게되었고 이는 곧 11개국을 움직여 한국의 경제지원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1966년]] 가을 [[서울]]을 찾은 11개국은 초기의 입장과는 달리 "월남전을 보니까 한국은 희망이 있는 나라더라"와 같은 수식어구를 만들어내며 실질적으로 반공산화를 위한 민주 자본진영 지원정책을 결정하게 되었고 대한국경제협력단을 만들어 1967년~1971년에 27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했다. 군수품을 제조해 수출하는 기업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에는 국제규격에 맞는 생산할 능력이 없어 난항을 겪었지만 차츰 국제규격에 걸맞는 제조능력을 키워나가게 되어 납품하게 되었다. 이외에 현지에 도로, 항만 등의 시설을 짓는 인력들도 진출하였다. 이리하여 베트남전에 대한 특수는 1966년 6,049만 달러, 1967년 1억 3,479만 달러, 1968년 1억 6,500만 달러에 이르는데, 이 해 수출액의 36%를 차지하였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 1970년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는데 이는 파병 특수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년간 [[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과 연관된 국내 송금액은 8억 7,250만 달러에 달했다. 이 중 수출·군납·건설·용역·기술자가 송금한 돈이 6억 9,427만 달러였고, 한국 군인이 송금한 돈이 1억 7,830만 달러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9년에 베트남으로 송출한 인력이 1만 5,500명이었고, 진출 기업도 79개 업체에 달했다. 당시 현대건설·한진상사·대우실업·금성전자를 비롯한 국내기업들이 군수물자 납품과 용역사업을 통해 베트남전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https://news.joins.com/article/17067033|#]][* 다른 국가에 비해서 낮은 이득이었다고 지적하는 바도 있다. [[미군]] 1인당 파견 비용이 1만3천 달러 수준, [[필리핀]] 비(非) 전투원 1인당 파견 비용 7,000달러, [[한국군]]은 1인당 5,000달러 수준이다.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한국]]의 이득(1965~1969)은 약 5억 5,000만 달러이며, 베트남에 파병하지 않은 [[일본]]의 이득보다는 적고, [[대만]]의 이득보다는 약간 상회하는 정도다. 이것은 1970년 사이밍턴 청문회 때 포터 [[주한미국대사]]가 참전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 이득을 설명한 대목이다. 즉, 전쟁에 참가하지 않던 일본이 한국보다 더 많은 금전적 대가를 베트남 전쟁에서 얻었다는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따지면 인당 5,000 달러라도 더 많은 액수를 받은 선진국들보다는 더 도움은 되었겠지만, 자유 진영에서 한국군이 미군 다음으로 가장 규모가 큰 군대였음을 생각하면 좀 아쉽다.] 이는 전쟁에 따른 눈에 보이는 직접적인 이득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부수적 소득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활약, 베트남 전쟁특수가 일궈낸 "신인도"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년~72년의 외자 도입액은 32억 8,820만 달러로 폭증했다. 이런 경제 발전과 맞물려서 [[한국군]]의 현대화도 이루어졌다. 베트남 전쟁 초기만 해도 한국군의 장비는 [[6.25 전쟁]] 당시와 별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참전 후 장비 개선의 필요성이 커지고 미국으로부터 신형 장비를 대량으로 원조받거나 구매하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독자 기술로 만든 국산 장비의 개발의 필요성 또한 커져서 [[국방과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국산 장비를 연구,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큰 의미가 없었던 [[전투식량]]도 이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도입하였다. 한편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도 끝내 패망한 남베트남의 말로는 남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불과 [[6.25 전쟁]]을 겪은 지 30년이 채 안 된 상황에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적화통일한 것이 마치 [[데자뷰]]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전쟁 재발시 공군을 투입해 도와주겠다는 닉슨 정부의 약속도 이후 들어선 포드 정부 당시 의회와 여론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남베트남의 원인인 무능과 국론분열을 이유를 들어 남베트남의 패망 이후 유신에 대한 저항이 싹 사라졌고, [[긴급조치]] 9호 발령에도 별 저항이 없었다.[* 당시는 정부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과 다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래 서적 문서에 있는 전환 시대 논리의 저자 [[리영희]]는 긴급조치 9호로 인하여 재판받고 형을 보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리영희가 저술한 <[[전환시대의 논리]]>는 베트남 전쟁을 제국주의 세력(미제) VS 민족 해방 세력(북베트남)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북한에 대한 공포심과 증오심이 가장 극에 달했던 때가 바로 남베트남의 패망 직후였다. 비록 1950년에서 1953년까지 남북이 3년 동안 [[6.25 전쟁]]을 벌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기는 했으나, 그 이후에도 남북의 평화통일을 외치는 [[조봉암]]이 대통령 선거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고 [[이승만 정부]]가 [[4.19 혁명]]으로 무너진 직후 한국의 대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북한 대학생들과 [[판문점]]에서 만나 평화통일을 논의하겠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을 만큼 월남 패망 전까진 그래도 한반도 평화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국민들 사이에서 꽤나 많았었다. 심지어 박정희 정부가 남북한의 평화 공존과 통일을 명시한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자 많은 국민들이 지지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75년 남베트남이 패망하자, 한반도의 평화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고, 대신 북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심과 공포심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분명 한국군은 북베트남과 베트콩에게 있어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 [[구정공세]] 이후 유일하게 선전했던 전투 지역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의 [[안케패스 전투|안케패스]] 지역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대치 소강 상태였던 것에 반해 한국군만 유일하게 성과를 내고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경보병, 즉, 알보병 위주의 파병과 적은 규모에서 명확한 한계가 있었다. 또한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한국이 얻은 뜻밖의 성과가 더 있는데, 바로 [[주한미군]] 주둔 협정인 [[한미행정협정]], 이른바 소파([[SOFA]])의 체결이다. 1967년 2월 9일에 발효된 소파는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관할권이 형식적으로나마 한국에 넘어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소파는 미국이 그냥 맺어준 것이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군대를 보내 미군을 도와 함께 싸우는 대가로 맺어준 것이었다. 그러니까 만약 베트남 전쟁에 한국이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면, 미국은 소파를 체결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눈으로 보면 소파에도 불공평한 내용들은 있으나, 그래도 미군을 한국에서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이 있고 없는 차이가 크다. 즉 아예 소파가 없었던 때보다는 훨씬 낫다. 실제로 미군 범죄에 관련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나마 소파가 체결되고 나서 미군 범죄가 현저하게 줄어들었고, 소파가 체결되기 전에는 지금보다 주한미군 범죄가 훨씬 심했고 도저히 통제불능이었다고 한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74쪽] 1960년대만 해도 주한미군들이 저지르는 범죄로 인해 죽거나 다치는 한국 국민들이 훨씬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1962년 2월 24일 주한미군에 폭행당한 임산부가 낙태한 사건, 1962년 5월 16일 미군부대에 출입하던 [[양공주]]가 미군들에게 윤간당하고 머리를 깎인 사건, 1962년 5월 29일 미군 장교가 부대 안의 한국인 종업원을 모아놓고 절도 혐의자를 전신주에 거꾸로 매달아 가혹한 매질을 한 사건 등이 잇따라 일어나자, 1962년 6월 6일 [[고려대]] 학생 2천여 명이 이런 주한미군 범죄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2권/ 121~122쪽][* 이건 미군이 자국 군인들의 대민범죄에 지나치게 관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소파 체결 이후에도 미군은 자국 군인이나 군속 혹은 그 가족이 한국인에게 저지른 범죄가 살인, 강도상해, 강도강간, [[아동 성범죄]] 같은 극악무도한 흉악범죄가 아니면 가능한 한국 법정에 넘기지 않고 어떻게든 법적절차를 질질 끌면서 자체적으로 피해 한국인에게 배상한 뒤 범죄자를 미국으로 신속하게 송환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물론 전과자로 등록되어 군대에서 추방당하고 이후 인생은 망하지만, 한국군인이나 한국 민간인, 일반 외국인이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유죄가 확실한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감옥에 갔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얼마나 봐줬는지 알 수 있다.] '''참전으로 인한 부작용도 분명 있었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헌법]]에 '''군인 및 군무원, 경찰공무원에 대한 [[이중배상금지]] 규정'''(현행 9차 헌법 29조 2항)이 들어가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베트남 전쟁이다. 원래 전쟁이 빨리 끝나서 사상자가 많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전쟁이 처절하게 진행되면서 전사, 실종자만 5,000명을 넘어가자 참전 전사자 유족 보상금만 해도 엄청난 규모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군인이나 경찰에게 원래 관행대로 거액을 보상하면[* 군법에 의한 보상액은 엄청나게 낮게 유지할 수 있다. 이는 다른 국가 보상 규정도 비슷한데, 대신 이 헌법에 다루는 대상을 제외하면 다른 방법으로 추가적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되어 있다.] 경제개발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었기에, [[사법 파동]]까지 일어났고 결국 헌법에 집어넣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